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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사람도 있는데…" 전원주의 고백 :: 2007/04/30 12:22
못생기고 키도 작고 항상 식모 역할만 하는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 갔다 한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 때부터였는데,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 그만큼 혹독한 환경 하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악착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 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 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 줄께" 하시는 것 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쥬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쳐보면 된다." 는 말씀 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주면 된다는 것 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 이었다. 손님이 쥬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 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일의 순서도 큰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따라 온 적도 있었다.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 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 이었다 .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 (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 없이 때리는 것 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 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해야 한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 흐지부지 목적 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 가지 외우는 것 이었다 .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과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는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한 명이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을동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 그 때부터 전원주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 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날락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 를 켜면 안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 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 맞고는 했다 .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2초면 사라진다 ."등으로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 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 학교를 졸업하는 날 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뭣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 것.
둘 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 째. 합창의 원리이다 .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 째.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 중얼 중얼..."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 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대는 것 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 마, 귀신 나올 것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 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 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을 다하여 경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강연2번, 녹화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예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예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 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 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와이프에게 잘해 줍시다..새벽편지에서 :: 2006/12/08 22:28
저만치서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
"여보, 점심 먹고 나서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나 점심 약속 있어."
해외출장 가 있는 친구를 팔아 한가로운 일요일,
아내와 집으로부터 탈출하려 집을 나서는데
양푼에 비빈 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나를 본다.
무릎 나온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품새다.
"언제 들어 올 거야?"
"나가봐야 알지."
시무룩해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어. 친구들이랑 술 한잔.... 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혀 약 좀 사오라고 전화했는데..."
"아... 배터리가 떨어졌어. 손 이리 내봐."
여러 번 혼자 땄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한테 미련하냐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응급실 진료비가 아깝다며
이제 말짱해졌다고 애써 웃어 보이며
검사받으라는 내 권유를 물리치고 병원을 나갔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아내가 이번 추석 때
친정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노발대발 하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안 된다고 했더니
"30년 동안,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
그럼 당신은 당신집 가, 나는 우리집 갈 테니깐."
큰소리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결혼하고 처음.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
"여보 만약 내가 지금 없어져도,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을 거야.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랐어."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 때,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살가워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수없이 해온 말들을 하고있다.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데도,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난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보, 집에 내려가기 전에...
어디 코스모스 많이 펴 있는 데 들렀다 갈까?"
"코스모스?"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 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보고 싶었나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당신,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야. 가자."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거 말고, 또 있어.
3년 부은 거야. 통장,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구...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잘했지 뭐. 그거 꼭 확인해 보고..."
"당신 정말... 왜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 올해 적금 타면,
우리 엄마 한 이백만원 만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 틀니 하셔야 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 내어... 엉엉.....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
"여보, 30년 전에 당신이 프러포즈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
"내가 뭐라 그랬는데..."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그랬나?"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거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 텐데...
여보, 안 일어나면, 안 간다! 여보?!..... 여보!?....."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었다.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버지의 1시간 :: 2006/12/06 10:10
년말 년초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에 대해 무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데 아래의 글이 참 감동적으로 와 닿습니다. 조금씩 시간을 내서 가족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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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일에 지쳐 피곤한 얼굴로
퇴근하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난 아들이 물었다.
"아빠는 한 시간에 돈을 얼마나 벌어요?"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냐.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냐?"
"그냥 알고 싶어서요. 말해주세요. 네?"
"네가 정 알아야겠다면... 한 시간에 20달러란다."
"아..." 아들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다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저에게 10달러만 빌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는 귀찮은 듯
"뭐하려고? 장난감이나 사려고 한다면
당장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자거라."
아들은 말없이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시간이 좀 지나니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10달러로 꼭 사야할 뭔가가 있었겠지.
게다가 평소에 자주 용돈을 달라고
떼쓰던 녀석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자니?"
"아니요, 아빠..."
"아빠가 좀 심했던 거 같구나.
오늘은 좀 힘든 일들이 많아서
네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자, 여기 네가 달라고 했던 10달러다."
아들은 벌떡 일어나서 미소 짓고는
"고마워요, 아빠!"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베개 아래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들은 천천히 돈을 세어 보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빠, 저 이젠 20달러가 있어요.
아빠의 시간을 1시간만 살 수 있을까요?
내일은 조금만 일찍 집에 돌아와 주세요.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출처: 새벽편지
먼저 하늘 나라로 간 딸아이를 그리며... :: 2006/06/05 10:22
한 아기 아빠가..모 라디오에 보낸 사연입니다.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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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산에 살고 있는 스물여덟 살의 애기아빠였던
이상훈이라고 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고 서툰 결혼생활에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물두 살에 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정은이....이정은.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스런 딸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밤늦도록 자지도 않고 저를 기다렸다가
그 고사리 같던 손으로 안마를 해준다며
제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제 볼에 뽀뽀하며
잠드는 아이를 보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99년 2월 29일. 2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오후 3시쯤에 장모님에게서 전화가 왔고
도로를 건너려고 하는 강아지를 잡으려다가
우리 아이가 차에 치었다고 했습니다.
하얀 침대시트 위에 가만히 누워 자는 듯한 아기를 보자
전 아이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6년 살고 간
아이가 너무 가엾습니다.
더 많은 것 해주지 못해서
더 맛있는 거 못 먹여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혼자 가는 길이 외롭진 않았는지 무섭진 않았는지
아빠가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습니다.
그렇게 아빠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내 아기
정은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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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간 딸에게 보내는 편지 ***
정은아. 사랑하는 내 딸! 어젯밤 꿈에 네가 보였단다.
아빠가 다섯 살 너의 생일 때 선물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네가 가장 좋아한 옷이었는데 못 가져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 아가가 가져갔더구나.
늘 아빠 가슴 속에 있던 네가
오늘은 너무나 사무치게 보고 싶어
아빠는 견딜 수가 없구나.
너를 잠시 다른 곳에 맡겨둔 거라고,
너를 잃은 게 아니라고
아빠 자신을 다스리며 참았던 고통이
오늘은 한꺼번에 밀려와 네가 없는
아빠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다.
아빠 나이 스물.
첫 눈에 반한 너의 엄마와 결혼해서 처음 얻은 너였지.
너무나 조그맣고 부드러워 조금이라도
세게 안으면 터질 것 같아
아빠는 너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단다.
조그만 포대기에 싸여 간간이 조그만 입



